인간의 존재는 상처이다.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주어진 조건이다.
이 지독한 슬픔을 피해 사람들은 정면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한 발씩 비껴서서 세상을
바라본다.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처절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되거나, 이미 훼손되어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황폐하다.따라서 그 모든 것을 잊기위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를 한다.
여기에는 애초부터 따뜻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먹고 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해서 '짐승의 시간'
으로 모든 것을 대체한다. 사는게 무엇이냐고 묻는 일 따위는 접어둔다.무슨일을 하든 부끄러움이 없다
세상은 충분히 폭력적이며 결코 온화하지가 않다.폭력적이므로 크고 작은 상처들이 도처에서
나 뒹군다.그 폭력에 대한 방어 기재는 돈이거나 신에 향한 귀의거나 아니면 쌩으로 고통을
겪어내고 견뎌야 한다.이 지점에서 이창동감독은 소란스럽지 않게 나즈막히 묻는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이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 할 수있는 것은 무엇이냐며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묻는다. 존재의 슬픔이다.
시쓰는 허연은 "이웃해 사는 당신들은 왜 그렇게 다들 엉망인지, 가면 마지막인지,
왜 아무도 사는 걸 가르쳐 주지 않는지, 나는 또 빛을 피해 걸어간다" 아픈 심정으로 적고 있다.
다들 상처로 부터,사는 일의 고통으로 부터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으로
부터는 위안이 될 만한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 해서 높은 담벼락을 만들며,첨단의 경보장치.
더 무서운 건 마음의 두터운 장벽을 쌓고 가시철망까지 두른다. 더 이상 다가오면 다칠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자신의 방에서 나오려고 하진 않는다.
소통을 하지 않으려 한다.그 것은 파괴된 마음이다.서로의 삶이 파괴된 채로 더 이상은 다치고 싶지 않다는 듯 다가오는 소통에게 칼을 휘두르고 길길이 날 뛴다. 우리의 이웃은 어떠한가.
집단대 집단.개인대 개인. 오로지 경쟁의 틀 속에서 살아남기위한 몸부림만으로 언젠가는
타인을 향한 뾰족한 송곳 하나쯤은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 볼 일이다.
줄거리
영화는 남편을 교통사고 잃고 남편의 고향으로 귀향하는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의 만남으로
시작된다.자신을 아는 이 없는 곳으로 부터 새롭게 시작해 보겠다는 신애는 그렇게'비밀의 �볕'으로
불리우는 밀양에 스며들게 된다.늙은 총각인 종찬은 신애를 위해 피아노 학원 자리도 알아봐주고
피아노 학원생유치를 돕기도 하며 신애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폐쇄적인 소도시에서 동네사람들과
어울릴 만한 시점에 돈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땅을 구입하겠다는 거짓말이 빌미가 되어
웅변 학원장으로 부터 아이가 납치가 되고 아이는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부이자 마지막이었던 아이를 잃게되자 신애는 미칠듯한 고통에서 헤메인다.
그 고통에서 헤어나기 위해 교회로 들어서게 되고 예배도중 신애는 격렬한 절규를 한다.
그것은 살만한 힘을 얻게 되는 동시에 새로운 빛이었다
이후 신애는 교회를 통해 자신의 고통과 상처로 부터 도망가고자 한다.
한편 종찬은 그림자처럼 신애의 옆을 지킨다.교회의 주차도우미를 하는가 하면,거리에서
전도를 하기위해 찬양팀에서 노래를 하기도 한다.그러나 그것은 신애를 향한 어설픈 사랑의 방식일
뿐 여전히 신애로 부터 사랑을 확인 받지 못한 외사랑이었다.
교회생활을 통한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갈 즈음(그러나 불안한 평화였고 위장된 안정이었다)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웅변학원장을 용서해 주기로 하고 그에게 면회를 가게 된다.
그에게 용서를 해주려는 마음은 그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었다"라는 말과 신애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하자 신애는
자신의 빛이었던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상실의 겪게 되면서, "당신을 저주하고 당신에게 당당히
맞서겠다고" 다짐을 한다.그는 장로인 약국 약사와의 정사를 하면서 신에게 보고있느냐고 묻기도하고
교회집회에서 유행가를 틀어 놓기도 하며 신에 대한 계율을 어기며 사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길수 없는
절망이었다. 결국은 자신의 손목을 그으면서 보고 있느냐고 묻지만 거리로 뛰쳐 나온 신애는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외치게 된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신애는 퇴원을 하게 되고
살인자의 딸이 일하고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짜르려하나 도저히 참지를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짜르려 한다,그때 종찬은 그녀에게 거울을 들어줌으로 해서 그녀를
돌보게 될것을 암시를 한다.그 마지막 장면 마당위로 떨어지는 �볕과 살짝 불었던 바람과
마당의 흙과 일상을 보여주던 세척제 프라스틱과 종찬과 신애를 보며 그 둘이 서로 애틋하게
살아가기를 마음으로 울며 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며, 잔인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여전히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종찬에게서 보게 된다.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그 말이 기독교적 사유의 방식이든, 평범한 일반인이든 여전히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줄수 있는
구원의 빛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그들이 피아노 학원과 카센타 사장으로 같이 밥을 먹으며
눈빛을 교환하며 웃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그래서 지상에서 한때 행복했었노라고 웃으며
세상을 떠나기를 바란다. 구원의 몫이 신의 영역이든 인간의 영역이든 간에 우리가 이 참담한
세상을 견딜수 있는것은 누군가에게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하는데 있으며 사랑만이
우리를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느낀다 .사랑지상주의 그런 주의가
있다면 신과 관계없이 영원히 사랑주의자로 남고 싶다.
이창동 감독은 결코 윽박지르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다.초록물고기 막둥이.박하사탕.오아시스의 공주
그리고 밀양을 통해 그는 다만 조용히 물을 뿐이다.
우리가 인간임을 회복하기까지는 삶의 전과정을 되묻는 방법을 통해,다시 말해 비판적 성찰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되묻는 방식이외는 없는 듯하다. 관계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사회를 바라보면서
타인을 향한 공격의 행위가 무엇이며, 그 공격의 행위로 인한 타인의 고통이나 상처를 헤아리는 일
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것은 서로 죽임의 사회가 아니라 상생의 따뜻함으로
나와 나 이외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며,그 회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보태는 일 거기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창동 감독에게 다시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나서 많이 아팠다.영화가 끝난후 뒷풀이로 포장마차에서 마신 술은 독주가 되어버렸다.
그 다음날까지 쓴물을 토해내며 끙끙 앓았다. 다 앓고 난 후의 세상은 처절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영화 밀양주제곡- christian basso/ crio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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