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jhskhk0627 2007. 6. 1. 21:25

정종미 우작 여인 -1999

 

 

 몽유도원도  1994

 강

 우작-몽상 1991

두얼굴의여인1992

 

 

우작-여인  1989

 적벽부 1991

 

 현

 몽유도원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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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대구생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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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의 빛, 합일의 정신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글쓰는 이들이 존경을 받아온 것은 그들이 아주 간략한 기호로 광대한 정신세계를 표상할 수 있었던 데 (그렇게 믿어졌던 데) 기인한다. 반면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인 행위로 제한된 사물을 만드는데 그쳐 (그렇게 여겨져)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홀대를 받아왔다. 미술가나 시인이나 학자에 비해 천시돼 온 것은 그들이 손으로 작업하는 이요, 정신과 이치를 표상하는 일에 한계를 가진 사람들로 치부됐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사람이 남다른 지적, 예술적 능력으로 회화를 시에 버금가는 '리버럴 아츠'로 '격상'시키려 노력했지만, 그 역시 "조각은 손노동인 까닭에 회화와 병립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나름의 한계를 노출했다. 레오나르도에게도 정신 우위의 사고는 여전했던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를 후자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보는 이런 이분법적 태도는 사실 엄청난 억압과 차별, 질곡의 원천이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이뤄져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우월한 것으로, 다른 하나를 열등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한쪽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이분법 안에는 성적 차별의 시선 또한 깊이 내재돼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이성적이며 여성은 물질적인 존재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런 시각의 좀더 완화된 관념이, 남성은 이성적이며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관념이다. 이런 시각의 좀더 완화된 관념이, 남성응 이성적이며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관념이다. 히스테리가 일종의 정신신경증임에도 불구하고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hystera'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 '여성적인 것'으로 치부되면 그 기원은 무조건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되고 만다. 여성이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라는 관념은 그만큼 여성을 물질에 보다 가까운 존재로 묶어두려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의 장르가 남성의 영역으로 나뉘었던 것도 이런 성차별적 이분법과 관계가 깊다. 순수미술, 그러니까 회화나 조각 따위는 보다 정신적인 조형 활동으로서 남성의 영역이 돼왔고, 수예나 장식 등 공예미술은 보다 물질적인 조형활동으로서 여성의 영역이 돼 왔다. 물론 생물학적인 차이가 남녀 사이에 존재하고 이로 인한 생리학적인 차이, 나아가 심리학적인 차이도 남녀 사이에는 당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차이와 차별은 전혀 다른 가치이다. 정신과 물질이 비대칭적으로 나뉘는 순간, 남성과 여성도 비대칭적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예술 안에서 지금도 극복되고 치유돼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잇는, 이 유구한 역사적 이분법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예술이 여전히 기대되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정종미는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정신의 붓'을 놓고 '물질의 채'를 택한 화가이다. 주지하듯 동양화의 대표적인 장르는 문인산수화이다. 문인산수화는 먹이라는 고도로 함축적인 재료를 통해 그리는 이의 인격, 나아가 우주의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자향(文字香)'이니 '서권기(書卷氣)'니 하는 말이 운위되는 것은 문인산수화가 갖는 이런 고귀한 정신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 정신성의 담지자는 다름 아닌 양반 사대부, 곧 보수적인 가부장문화의 정점에 선 이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 나름대로 필력도 있었고, "동양화 붓을 처음 잡았을 때 마치 전생에도 이런 그림을 그렸던 양" 익숙하게 느껴졌던 그로서는 이 문인산수의 붓을 놓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 이 시점의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수묵의 세계로부터 성큼 벗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정종미가 택한 길은 전통적인 염료를 장지에 바르며 무수하고도 꾸준한 재료의 실험을 통해 물질과 색이 자아내는 세계를 깊이 천착하는 것이었다. 그 고단한 과정은 매우 공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통적 시각에 따르자면 그만큼 매우 여성적인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왕의 이분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 구분으로 '퇴각'해 안주하고자 히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도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꾸준히 작업을 했다는 그의 말을 빌지 않덜도, 그는 자신의 화업에 전존재를 투자해 온 당찬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으로서, 또 테크놀러지 시대의 전통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분명히 세우기 위해 주체적으로 나아가다 보니 오히려 소외되고 그늘져온 길로 들어섰던 것뿐이다. 이런 그의 태도는 결국 정신/물질,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아래로부터' 극복하고 그 뜨거운 예술적 체험을 통해 정신과 물질이 합일되는 경지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추구와 관련해 매우 시사적인 것은, 다양한 재료를 통해 물질의 세계를 천착하는 그의 예술이 무엇보다 물질 만능의 시대인 오늘 물질의 의미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재료를 다루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진정 물질을 떠난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겠구나, 정신이 담기지 않은 물질을 생산하는 것은 죄악이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물질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물질에 정신을 담지 않는 인간이, 바로 오늘날이 그런 시대라면, 그 시대가 나쁜 것이다. 물질 만능의 시대는 지난 세월 정신 우위의 시대를 구가해 온 인간에 대한 반격 혹은 보복일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보복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으로 추의 균형을 잡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듯 끊임없이 재료에 대해 연구하고 찾고 실험하는 정종미의 노력이, 시류와는 어긋나 보임에도, 퇴행적이거나 고답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반갑고 고맙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치유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그는 그 어떤 전위예술가 못지 않은, 앞서가는 예술가이다.

정종미의 일반적인 작업과정을 여기서 잠깐 들여다보자, 그의 작업은 종이를 염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목에 물을 붓고 끓여 나온 액을 종이에 붓으로 발라 염색한다. 그 뒤 아교 바르는 일을 하는데, 아교는 물에 부어 냉장고에서 하룻밤 불린 후 70-80도씨 에서 용해해 사용한다. 이 교수(아교물)에 백반 용해 액을 넣어 종이에 바른다. 종이를 건조한 뒤 홍두깨에 말아 힘껏 두들긴다. 섬유질 사이의 빈 공간을 줄여 모세관 현상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이제 물감을 만드는데, 천연 안료를 유리면 위에 올려놓고 아교 농액을 떨어뜨린 뒤 멀러라는 도구로 간다. 완전히 갈린 안료에 교수를 붓고 채색을 한다. 채색이 완료되면 콩즙을 바르는데, 콩즙은 콩을 여러날 충분히 불려 콩 속의 유지가 물과 친숙해졌을 때 믹서로 갈아 채로 걸러 만든다. 콩즙을 화면에 바르면 건조 뒤 다시는 물에 반응하지 않아 단단한 방수제가 된다. 이 위에 염색한 천 따위를 콜라주한다. 이때 접착제 역시 밀가루를 6개월에 걸쳐 삭혀 전분으로 만든 뒤 풀로 제작한다. 설명이야 간단하지만, 모두 지난한 과정이다. 이와 과련해 정종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 바 있다.

"종이 위에 숨결을 담는 일, 인성을 부여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수없이 올리고 닦고 지우고 훔쳐내기. 그런 후에 다시 찢고 붙이고 뜯어내기, 그 과정에서 나의 의도를 멀찍이 벗어난 것들을 버리고 체념하고 용납하기.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너질 듯한 어깨, 손가락 마디가 갈라지는 듯한 고된 노동 속에서 가끔 몰려오는 회의...."

이렇게 물질과 투쟁을 벌이며, 물질을 어르고 달래노라면 그는 자신과 재료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느낀다. 정신은 이렇게 물질을 되찾고 물질은 그렇게 정신을 품어 안는다. 우리 할머니들이 만든 조각보를 볼 때마다 그것이 버려진 천의 파편들로 이뤄진 아름다운 조형물임과 동시에 어떤 인고의 순간에도 관용과 멋을 잃지 않았던 그분들의 정신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정종미의 그림 역시 하나의 견고한 물질세계이자 유현한 정신세계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 합일된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정신/물질,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가능성과 관용의 저수지로서 다양한 감각적, 정신적 만족을 누리게 하다는 것이다. 옛날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도 흥건히 느껴지고, 여인들의 한과 인내, 깊은 지혜도 충만히 느껴진다. 도깨비는 인간의 땀과 피 같은 것들이 묻은 빗자루, 부지깽이 같은 것이 변해서 된 것이라던가.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물질과 인간의 노동이 절실히 만나면 거기서 자연스레 정신이 움틈을 알았다. 정종미는 그렇게 우리 전통 재료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그로부터 정신의 숨결을 되살렸다. 이렇게 만나는 정신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정신이 아닐까. 그 정신을 만나기 위해 그는 오늘도 재료와 한몸으로 어우리지고 노동의 시간에 자신의 전존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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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미의 오색산수
 

글 / 오 광 수

   정종미의 작품이 갖는 독자성은 먼저 재질의 선택에서 기인한다. 굳이 분류한다면 그의 방법은 동양화 중 채색화의 영역에 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채색의 선택과 방법은 일반적인 채색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명에 의한 채색이나 사용법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우리의 고유한 채색방법을 재현해 내고 그것을 현대적 감성에 상응되게 구현해 내고 있음이다. 그의 작업은 먼저 소지의 선택에서 그 독자의 영역을 확보해 간다. 그림이 얹히게 되는 바탕 -소지- 은 작가가 어떤 식으로 작업을 전개시킬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유도해 낸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소지는 장지이다. 장지의 선택이 이미 90년대 초부터이나 그것이 더욱 구체적인 재료로서의 중요성을 간파하게 된 것은 그의 회고에 의하면 93년 2년 간의 미국체류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본다. “93년 이후 2년 동안의 미국체류 기간 동안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과 학업은 그림에 대한 나의 사고와 창작의지에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2회전에서 싹트기 시작한 재료에 대한 관심은 미국행을 계기로 더욱 적극적인 것이 되었다.” 막연했던 재료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고해짐으로써 그의 작업은 비로소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갈 수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장지는 전통적인 회화의 소지로서 널리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용구의 제작에도 사용되었다. 근세에 오면서 양지가 보편화되고 전통적인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장지의 사용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장지 생산기술도 낙후 현상을 막을 수 없었다. 현대화에 따른 고유한 재료와 방법의 퇴색은 전 영역에 걸친 것이지만 특히 회화 분야에서의 그 피폐는 가장 심각한 국면에 이른 느낌이다. 모필과 수묵의 사용은 물론이려니와 고유한 채색재료와 그 사용방법은 이미 많은 한국화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는 인상이다. 굳이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고유한 방법과 정서를 팽개치면서까지 서양적인 방법에 급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구체적인 작업의 방식을 통해 피력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정종미의 작업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데가 있다. 그의 장지의 선택은 가장 기본적인 질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얹는 소지로서 머물지 않고 매재로서의 특수성을 개발해 가는데 그의 독자적인 방법의 전개가 엿보인다.

장지를 다듬이 위에서 두드려 더욱 부드럽게 한 후 담채의 수간 안료와 아교를 수없이 반복해서 발라 올린 후 다시 콩즙을 메겨 투명한 두께를 만드는 작업이 이어진다. 이 위에 다시 채색을 가하고 또 콩즙을 발라 뉘앙스를 낸다. 이 같은 방법은 일정치 않고 다양한 변주를 통해 주어진 상황과 내용에 대응시켜 간다. 이 같은 작업은 단순 노동을 넘어 오랜 연마와 회의를 거듭해 가는 인고의 과정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먼저 다듬이 위에서 도침을 하고 담채의 수간 안료를 아교와 수없이 바르기, 콩을 여러날 불려 갈아서 콩즙을 짠 후 수없이 올리고 닦고 지우고 훔쳐내기. 그런 후에 다시 붙이고 뜯어내기. 그 과정에서 나의 의도를 멀찍이 벗어난 것들을 버리고 체념하고 용납하기. 손바닥에 물집히 잡히고 무너질 듯한 어깨. 손가락 마디가 달라지는 듯한 고된 노동 속에서 가끔 몰려오는 회의......” 그의 작업이 얼마나 많은 공정을 거치는가를 엿보게 하며 그러한 작업이 얼마만한 인내를 요구하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장지를 순화시키고 이 위에 다양한 채색방법을 강구해 가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말하고 있듯 고된 노동과 잇따르는 회의는 이 오랜 과정을 통해 반복되는 것이어서 그의 작업이 얼마나 인고의 연속인가를 엿보게 한다. 그의 채색 기법은 염색으로 바탕을 조성하고 이 위에 안료를 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염색은 스며들고 채색은 화면 위에 얹히는 것이 된다. 염료는 천연염료를 사용하고 안료는 수간채와 석채를 사용하는데 석채도 천연과 인공으로 나눌 수 있다. 천연의 염료란 오래전 우리 조상들에 의해 채취된 것들로 이를 재생해내고 있다. 예컨대 제주도의 땡감을 따와서 그 생즙을 내어 종이에 염색하는 식이다. 장지기법에서의 안료는 혼색을 해서 사용해서는 안되고 색을 한층 쌓아올리리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독특한 깊이가 우러나오게 되며 풍부한 뉘앙스가 획득된다. “은은히 품은 빛, 숨결같이 고른 표피, 체온을 받아주는 포근함”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과 그 결과는 매재를 단순한 매재로 머물게 하지 않고 매재 자체가 곧 회화 그것이 되게 하고 있다. 매재라는 물성 자체가 회화로 대용되고 있는 독특한 경지를 보이는 것이다. 장지의 선택에서부커 채색을 가하는 일정한 과정을 통하는 가운데 어느덧 매재는 매개적인 존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회화가 되는 특이한 국면에 이르게 된다. 매재이면서 동시에 회화 자체인 경지에 도달된 것이다. 종이와 색료의 물질성을 걸러내고 중화의 단계에 들어선 경지이기도 한 이 연금술에서야말로 정종미의 독자한 조형세계의 내역이 파악되어진다.

그의 근작은 이 기본적인 과정을 거친 작업들로 때로는 색면에 의한 추상적 화면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천이나 또 다른 종이를 꼬라쥬하여 공간감을 형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흐릿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첨가하기도 한다. 이전의 여인상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의 서술보다 주로 색면에 의한 투명한 공간감을 추구하는 경향에로 경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조 안견에 의해 그려졌던 <몽유도원도>의 이미지는 변주된 형식으로 그의 많은 작품의 명제로 떠오른다. <몽유황색도>, <몽유고서도>, <몽유녹색도> 등이 그런 유형이다. 물론 작가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깊은 감화를 받았던 체험의 유산일 수도 있겠으나 오랜 세월을 격한 저쪽에로 향하는 회귀의식의 극히 자연스론 발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보다 혜원의 미인도가 좋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보다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가 훨씬 아름답다”고. 그가 왜 몽유도원도를 고집하고 있는가를 알 듯하다. 그가 추구해마지 않는 방법도 그렇거니와 회화에 대한 근원적인 의식도 우리의 고유성에 대한 애착에 가 닿아있음을 엿보게 한다. 그러기에 경주 남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내고 다산이 걸었던 오르막길에서도 깊은 상념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의 그림은 단순한 한 폭의 그림으로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다시 환기해 주는 매개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랜 인고의 과정에서 빚어진 예지와 투명한 의식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본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