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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중심으로 50년만에 내린 폭설은 고향을 향해 출발하려던
외지인들의 발을 묶어 놓고 공항과 철도,육로의 모든 길을 차단해 놓고 발을 동동 구르게 하였다.
전날 협력업체의 동행할 담당차장은 중국 현지의 교통 상황이 원할하지 않음을 근거로 구정이후로 방문을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은근한 권유를 해왔다. 일언지하에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더라도 가자는 말로
그의 요구를 묵살한 것이 화근이었다. 일주일에 월요일, 목요일 두 번 뜨는 인천에서 닝보까지의 길은
월요일 회의로 인해 어쩔수없이 화요일 항저우 공항에서 다시 육로를 통해 닝보에 도착해야 했다.
항저우 공항에 도착하자 날씨가 조금 쌀쌀 했을 뿐 그다지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항저우를
지나 소흥를 통과 할 즈음 눈보라가 시작되었다.폭설로 인해 둔하게 움직이던 차량들은 납작하게
기어 나갔다.항저우에서 육로로는 두시간, 중국적상황(변수가 많은)을 감안하더라도 세시간이면 될 거라
생각을 하던 나로서는 상황이 조금 심각함을 그제서야 깨달았다.중국의 동쪽도시들이 거의 그렇듯
잿빛의 하늘이었지만 점점 하늘이 화가나기 시작하자 검회색의 어둡고 침침한 얼굴로 변해갔다.
이제는 갈 수 있느냐,없느냐의 지경에 까지 이르러서도 계속 진행을 할 것을 부탁했다. 출장스케쥴은 늘 팍팍했다.다음날은 상하이, 그 다음날은 웨이하이까지 움직여야 했다.게다가 하루라도 더 빨리
선적하려고 상하이로 이동하던 물건들이 난징에서 고속도로를 통제하는 바람에 이틀째 발이 묶여 있었다. 닝보에 도착한다고 해도 일은 볼 수가 없었음에도 계속 달릴것을 주문한 나를 보면서 '미친듯이'
살아왔다는 명백한 상황을 참담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2
북극의 눈이 녹기 시작해서 해수면이 올라가는 관계로 지구의 기후가 돌발상황이 자주 생기고 있다고 한다.한국도 몇십년 후에는 중부지방까지 아열대기후로 바뀔 것이라고 한다.이미 남쪽의 바다에서 석화가
발생하고 있고,동해에서는 한류의 어종들이 사라지고 있으며, 제주도에서는 아열대지방의 과실수를
심고,연구하고 있다고 하니 그리 틀린말은 아닐것이다.중동의 두바이에 눈이 내려 눈싸움을 하는 장면이
신문에 잡혔으니 중국 남쪽에 폭설이 내렸다고 이상한 일은 아닐것이다.
문제는 사람들만 노마드가 된 것이 아니라 기후며,식물이며,동물,어류까지도 노마드가 된것이다.
한 곳에 오랫동안 정주하며 자연과 자연,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통해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던 공동체성은, 짧은 만남후의 이동으로 인해 서로간의 피상적인 이해만이 존재를 하며,
깊게 교류할 시간을 차단함으로써 이익을 위한 관계의 설정만이 남게된 것이다.
하이네는 기차의 속도로 인해 공간이 살해되었다고 말을 한다.속도는 풍경을 살해한 것 뿐만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처참하게 만든다.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미친듯이 달린다. 달리는 끝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문이 달랑 남아 있는다.
3
근 4년을 서양철학사 공부(?)를 독학으로 진행하였다.굵직한 테제들을 보기는 했으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도대체가 무엇인지를 아직도 파악하지를 못하겠다.신에 저항한 근대의 철학적 테제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는 그놈이 그놈 같았다.물론 얄팍한 철학적 용어들은 건졌으나 그것은 입밖으로 낼 수도 없는 정리된 개념이 아니었다.그리고는 다시 중국 철학사를 공부해야 했다.
공부라는 것이 원전과 원전에 대한 텍스트와 메타 텍스트까지 포함하여 정리하는 일이며,다시 개인에게 돌아와서 창조적 확장과 깊이를 담아내는 것이라 전제한다면 공부라고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국철학사라고는 하지만 신영복 선생의 정리를 통한 이해였고 계획대로라면 다음은 조선에 대한 공부를 해야했다.
공부를 하려고 하던 그 시점이 누구나 그렇듯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었던 것인데 시장권력이 국가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국가권력이 시장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을 하고,그 전락이라는 것이 그다지 온당하지 않은 폭력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자,이런 공부가 아무짝에 쓸모없음을 느껴 버렸다.그것은 촘촘하고도 거대한 그물망이며,그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함이 '현실"이라는
이름을 안 순간 부터 이미 보잘 것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거칠게 이야기하자면 현실이 한 개인에게 쥐어준 일이란 잉여생산의 재분배를 요구하거나,알아서 무릎꿇고 주는대로 받고 생존을 구걸하는 일이어서 그 일은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에 다름아니었다.서로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의 충돌속에 힘에서 우위를 확보한 자들이 스스로의 영역을 확장하고-그 영역표시는 동물들이 배설물을 통해 경계를 그어놓는 유치하고도 명확한 행위-모든 구조를 그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바꾸어 놓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바가 없는 세상에서,
한 개인은 무엇인가.욕망을 위한 생산과 소비는 불과 근 200년 동안 몇 만년동안 지속되어 온 지도를 빠르게 바꾸어 놓고 있다.모든 인간을 자본의 가치로 환산하며,공동체로 지나온 시간을 고립되고 이기적인 생존으로 만들었으며, 타자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소비의 경쟁을 부추김으로서 브레이크없이 질주하는 욕망의 전차를 만들었다.버스를 만들어 마을공동체를 파괴하고, 배를 만들어 물류의 이동을 도왔으며, 비행기를 통해 욕망의 이동을 빠르게 만들었다.소비를 위한 매연.생산과 소비로 인한 그 결과 온실화는 빠른 속도로 인간에 대한 반격과 응징을 가하고 있다.욕망을 다스리는 구조는 무엇일까.종교행위?.정치적행위? 아니면 인간 스스로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님을 깨닫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지켜주는 반성의 구도일까.그 구도를 통한 구조를 만드는 일일까.
인간의 욕망이 폭설을 만들고,쓰나미를 만들고,세상을 기형의 구조로 만든 지금
미친듯이 살아 온 것은 아닐까.더빠르게. 더 높이 올림픽 구호처럼.
폭설은 지나쳐 온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