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삼복 처서 다 지나 미쳐 달아오른 날, 묵밥집 앞을 지나다 보
았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강단 없이 쓰러진 장場판 한 귀퉁
이, 낡은 철재 옷걸이에 걸려 슬픈 꿈처럼 흔들리던 에르네스
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총도 없이 색 바
랜 티셔츠들 중 제일 앞에 내걸린 그는 여전히 대장이었다. 얼
굴 가득 소금기 머금은 초로의 여인이 가르쳐준 그의 이름은
만 오천 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의 얼굴 위로 몇 방울 땀
들이 또옥 똑 떨어져 눈물처럼 번져가는 뜨끈한 오후, 날염된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만지작됐다. 나의 호주머니는 곤궁했으
므로...... , 엄지와 검지에 침을 바른 그녀가 말없이 검은 비닐
봉지 아가리를 벌려 그를 포개 넣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그것
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는 그의 새 이름을 나즈막이 말해주었
다. 만 이천 원이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바나, 평양, 이름 모를 볼리비아 어느
숲을 지나 거대한 마트에 짓눌려 몰락한 오일장 판에서 아직도
그는 가난한 자들의 식지 않은 밥 덩어리였다. 식은 밥 덩어리
인 나와 꼭 같은 서른아홉이 그의 생물학적 수명이었다. 돌아
오는 내내 비닐봉지를 든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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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한 말
눈물을 머금는다는 말처럼 아슬한 말 있을까
늦은 술자리 끝
술방 문 열고 나서는데
아랫배 축 늘어트린 하현달 아래
꽃 지고 잎 다져
맨살만 하얗게 비치는 배롱나무 한 그루
그 가지 끝
지난 생을 마저 털어내지 못한 미련으로
터질 듯 터질 듯 차마 터트릴 수 없는
말간 눈물들 달려 있네
슬픔이 영글면 언젠간 터질 텐데
오롯이 작은 꽃잎에 매달려
짧게 지나간 사랑했던 날들
길게도 배웅하고 돌아서서
저토록 모질게 참는 몸이라니
머금은 몸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
그의 생을 거슬러 올라가보기도 하는데
꽃피던 그 즈음이었던가......
내 눈 끝마저 시려와
잠시 한눈파는 사이
상강霜降의 밤을 막 지나온 바람
그 가지 끝에 걸려 넘어지네
마침내
툭,
터져버리네
저 눈물들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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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퇴근을 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시집이 한 권 도착해 있다.
며칠은 지나야 서점에 깔려있을 김명기 시인의 첫 시집이다.
봉투를 뜯고 꺼낸 시집은 단정하다. 조심스레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본다.
격렬한 그의 얼굴과는 또 다른 얼굴이어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의 시어들은 정직하고 따듯하다.
몸으로 지나온 길들을 소란없이 나즉히 나즉히 들려주는 고백 같다.
소중했으나 잃어버렸던,사라져가는 사물과 풍경들을 꺼내어 보여주기도 하는데,
사라져가는 뭇 풍경들은 자본의 폭력으로부터 소외되어가는 안타까움들이다.
그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절 집, 젊은 중의 수행 같기도 하다.
그가 바라보던 '막걸리 집 미자씨'며 '북평 장날'이며 '시장 기름집''와카나이 항' , 묵호의 마을들을
혹은 절집을 따라가다보면 동해바다 해변가를 걷고있는 한 사내가 보인다.
그의 시가 바닷바람을 몰고 나에게 왔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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