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통하여

님은 먼곳에

ojhskhk0627 2008. 8. 14. 19:15

 

                                                                                            

                                                                                            

                                                                                                     

 

수애

 

인생은 누구나 스스로의 거미줄에 갇혀있다.그 갇혀있음으로하여 인간은 욕망한다.

정신의 허기이든 육체의 허기이든 만족할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명제이다.신의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신이 없다면 할 수 없고).

그 한계에서 벗어나는 일이란 역설적이게도 무가 되는 일이다.죽음이 있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진정으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다만 그 거미줄의 갇혀있음이

어떤 색깔의, 어떤고통의, 어떤깊이에서 바라보고 있으며,어떠한 자세로 스스로를 찾아가고자

하는 물음에 있는 것이다.물론 그 갇혀있음의 외적정체는 자본주의라는 비인간적인 씨스템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그 씨스템은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으며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생존의 조건을 피투성의 경쟁과 이윤으로 몰아감으로써 인간의 존재란 물음을 무릎꿇히고 상처를 입힌다.

무릎꿇힌 생존은 다양한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지만  그 탈출구 역시 내적정체성에 혼란을 가중하고

평안한 생존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세상을 그녀는 슬픔을 체념으로,혹은 견딤으로 세상을 껴안고 사는 여자이다.

그녀의 얼굴의 음영에는 웃을듯 말듯 안개의 언어가 깃들여있다. 정작 그녀의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는 미친듯이 폭발할것 같은 기운을 지울 수가 없다.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하다.그 목소리는 거칠지도 않으며,즐겁지도 않으며 방만하지도 않다.조근조근 내면이 정리된 성숙한 인간의 영혼을 흘러내는 말이다.세련되지는 않으나 정직하다. 이 영화는 그런 수애를 위한 영화이다.줄거리의 설득력이 다소 애매모호한 중간중간을 빼고라도 잠시 한 시대를 조명해보고 한 여인의 연대기를 회상해보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다.자칫하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념이 충돌할 수도 있었겠지만 촛점은 허술한 밴드를 조명하며 아슬하게 피해간다. 

 

외곽의 풍경

 

이 영화는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외곽의 풍경이다.남편을 면회하러 가는 길도,베트남으로 떠나는 배도, 그 배에 동승한 군인과 딴따라 일행도,심지어는 사이공이라는 세월의 건너편에 있는 도시도 외곽이며, 전쟁터도 마찬가지로 외곽의 인생일 뿐이다.전쟁은 다양한 존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에서 잉태한다.그것은 필연적으로 선을 가장한 악의 모습이다. 전쟁이란 무력의 싸움을 통해

타자를 굴복시키는 행위이며 생명있는 존재에 대한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이다. 한 사회가 어떤 명분으로든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를 합의하게 되는 배경에는 목숨의 가치에 대해 일탈한 파쇼적인 틀이 존재하게 된다.이는 어떤 잇슈가 투명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요와 무력으로서의

굴복을 통해 나타난다.전쟁뿐만 아니라 사회적 제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것을

야만이라 부른다. 종적 명령체계는 폭력을 통해  유지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 밖에 없는 씨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진행된다.그 씨스템속에서의 한개인은 상처와 분노를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모든 세계의 중심을 향하여 직진하는 인간은 욕망에 대한 굵은뿌리가 존재한다. 욕심이다. 그 욕심은 어떻게 포장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사물과 우주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각 개인마다 취향이 있다.중심을 권력이라 할 때 권력은 취향의 인정을 거부하고 색깔을 인정하지 않는다.외곽의 풍경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중심에 의해 가공되기도 하고 멸절하기도 한다.

밴드의 이동을 통한 카메라는 비껴가고 싶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으로 전쟁이란 부분과 조우할 수

밖에 없다.거기에는 국가라는 이름이 있다.정치를 생활에서 제치고 빼는한 각 개인의 개별적 존재성은 그들이 빼내고 제친만큼 생활속에서 피를 흘린다.만약에 한명의 부를 위해 아홉명의 희생으로 국가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함이 개별적 생명과 무릎꿇힘으로 모욕으로 생활속에서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돌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외곽은 그렇게 만들어진다.생뚱맞겠지만 우리들 삶의 현재적 위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기륭전자로 대표되는 비정규직처럼(정규직 노동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언제든 전락의 전락을 거듭할 수가 있을 것이다.죽음으로써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그 속에서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할까.마찬가지로 변두리 판자촌도,그 마저도 잃고 밀려 밀려 떠나야하는 눈물의 흐름이다. 그 눈물은 비정치적 생활이 만들어 낸, 난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은 비주체적인 정치가 만들어 낸 산물이며 외곽의 풍경이다. 기실 외곽의 풍경이란 주체적인 낭만이 아닌 밀려나고 흩어진 서러움이고 뼈아픈 소외일뿐이다.

 

줄거리

 

영화는 그 국가가 만들어 낸 병영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수애의 남편 엄태웅은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도 집안의 선택에 의한 수애와 결혼을 하게된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군대로 도망을 가버리고 수애는 한달에 한 번 면회를 가곤한다.

"니 내 사랑하나"를 묻는 말에 수애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그 물음은 수애가 월남으로 떠나게하는

은유적 모티브로 사용되어 졌으나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월남까지 가게만든 내용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헤어지자고 온 이별의 편지를  내무반에서 공개함으로 모욕을 느낀

엄태웅은 선임을 폭행하게 이르며 영창과 베트남을 선택하라는 부대장의 요구에 의해 둘은 베트남을 선택한다.한편 대를 잇기위해 노력하던 엄태웅의 어머니는 아들이 베트남에 가있다는 것을 알고

수애로 인해 그런 상황이 만들어졌다며 수애를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친정으로 간 수애는

아버지의 의해 집안에 발들여 놓는 것을 거절 당한다. 결국 다시 돌아왔으나 시어머니는 월남에

아들을 찾으러 가겠다고 나선다.수애는 스스로 찾아겠다며 물어물어 위문공연을  알선하는 곳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밴드마스터 정진영을 만나게 되고 정진영은 사기꾼이며 한량으로 수애의 돈을 통해

월남으로 도망을 치게된다. 월남에서 첫 미군들을 상대로 한 데뷔무대에서 밴드는 대 망신을 당하지만

정진영의 밴드는 한국군을 상대로 한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게되고 승승장구 큰무대에서 공연하던 중

베트콩에 의해 폭격을 맞고 정진영의 밴드는 베트콩의 의해 잡힌다.  후 힘들다.

포로의 생활속에서도 수애는 노래를 통해 그들에게 위안을 주곤 한다. 미군의 대공세에 의해 폭격을 맞은 터널에서 빠져 나온다. 미군에게 잡힌 정진영은 미국국가를 온 몸으로 절절하게 부름으로해서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와 한국의 밴드라는 것을 알리게 된다.그러한 인연으로 미군클럽에서 노래를 하게된 수애는 조신한 유교적 틀을 버리고 미군의 팁을 받아가며 눈물로 노래를 부르게 된다.

클럽에서의 노래가 성공을 거두게 되자 수애는 미군장교에게 자신의 남편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 부탁은 수애의 몸을 전제로 한 조건이 되자 정진영의 밴드는 팁으로 받은 돈을 불태워

버리고 상심을 한다.미군장교의 도움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호이안에 도착한 수애는 전투도중 반은 미친 그의 남편 엄태웅을,만나게 된다.남편을 만난 수애는 연거푸 엄태웅의 얼굴을 때리고 엄태웅은 머나먼 월남까지 찾아온 수애를 보며 자책에 몸부림치고 눈물을 흘린다.그리고 엔딩.

 

 

"니 내 사랑하나"

 

수애의 남편 엄태웅도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도,미군도, 전쟁의 당사국인 북베트남군인도 모두

사랑에 상처받은 자들이다.마땅히 가장 근거리에서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할 사람과 씨스템에서 이미 버림을 받은 절망의 사람들이다.그런 수애는 노래를 통해 가장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들을 슬퍼하고 위로한다.그 행위에는 이념도,정치적 고려도 없으며,단지 그녀가 가야할 길을 마땅히 걸어가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수애 그 자신이 갖고있던 유교적 카테고리를 과감히 던지고 퇴폐한 미군클럽에서 눈물로써 노래를 하는 과정은 한국이라는 남성중심주의에게 뼈아픈 굴욕을 맛보게 하지만 수애 자신으로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자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뼈아픈 노력이다.

나 역시 대한민국의 마초로서 당연히 분노와 굴욕감을 맛보게 된다.이 부분에서 분분한 의견이 있겠지만 굳이 확대해석하고 싶은 이유는 그녀가 찾아간 곳이 생과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였다는 것.장면마다스스로를 버림으로해서 이성과 감성을 넘어선 화엄의 모습으로 보았다는 것은 오바일까.거대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일상속에서 화엄의 모습이란 나의 타자가 존엄과 존경을 찾게하는 실천의 모습은 아닐까 싶다.수애에게 따귀를 맞는 엔딩씬에서 엄태웅의 절규는 자신 스스로에게 맺혔던 이기와 졸렬함에 대한 반성과 스스로에 대한 화해였다.그가 처절하게 울었던 것처럼 나의 졸렬함과 이기도 속울음으로 흐느낀 영화였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의 우리의 존재조건이란 공동체적 조건을 벗어날 수가 없다.완벽하게 홀로 설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다만 시스템에 의해 파편화된 개인이 이기적인 생존을 살아갈 뿐이다. 사랑없는 세상은 참담하다. 사랑없는 세상은 잔인할 뿐 아니라

피폐하다.이 피폐한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은 온전히 나를 조금씩 내어놓는 방법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무 많은 벽들에 막혀 있다.벽은 막혀있는데 소통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사랑을 배우지 못했다.사랑하지 못해 장벽을 넘을 수가 없다. 한계다.

영화의 엔딩자막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곤고한 자인가 탄식이 나왔다. 한계다.

 

짧은 생각

 

초딩보다 못한 이명박정권의 유치하고 한심스러운 사고들,그 졸렬함을 사랑해야하는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 졸렬함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상처와 분노로 몰아넣고 있는지.

인간의 한계다. 인간다운 삶의 확보와 폭력으로 점철된 야만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오늘도

관을 위에 올려놓고 단식을 하고있는 기륭전자의 투쟁을 보며 나는 분열되었다.

가느다란 연대의 신호도 보내지 못한 채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나는 얼마나 분열된 존재인가.

 

 

사랑이 있어야

눈물이 있어야

생명

다독거리는 손길있어야

그래야 그게 참여다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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